<화요세평>이 시대의 어른을 만나다, 김장하
황수주 광주북구청소년상담복지·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장
“탕! 탕! 탕!, 문 좀 열어주세요!”. 새벽부터 약방 문을 누군가가 다급하게 두드린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시며 방문을 열고 약방으로 나선다. 아이가 아파서 급하게 약을 사러 왔다. 약방 때문에 어디를 가셔도 늘 급하게 돌아오시고, 가족끼리 나들이 간 기억도 없다. 아픈 사람들이 언제 올지 몰라서 토요일 일요일 명절도 없이 늘 약방을 지키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의원에서 근무를 하다 약종상 면허시험에 합격해 섬에 약방을 여셨다. 약종상 제도는 1953년 약사법 제정 당시 의사, 약사 등 전문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의료 소외지역을 중심으로 약종상은 약방을, 한약종상은 한약방을 개설하여 허가지역에서 매약과 한약을 판매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약종상 제도가 없어져 시골에서도 약방이나 한약방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경남서 60여년 한약방 운영
메일을 보는데 한 언론사의 뉴스레터에 휴먼다큐 ‘어른 김장하’에 대한 내용이 소개됐다. 이 다큐는 주인공의 직접적인 인터뷰보다는 그를 아는 분들로부터 그의 여정을 찾아가는 탐사보도이다. 어떻게 이런 분이 이제서야 세상에 알려졌을까? 뜻있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지만 어디를 가나 항상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선행을 알리지도 않고 알려지는 것도 싫어해 인터뷰를 하지 않는 그의 성정 때문에 베일에 쌓였다. 그의 이야기는 경남도민일보를 은퇴한 김주환 기자가 그의 삶을 수십년간 쫓으면서 알려졌다. 김장하는 돈이 많으면서 자동차를 가지지 않았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김 기자는 그를 보면서 자동차를 가지지 않았다. 당시 기자 월급으로 자동차를 가지려면 부정한 유혹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은 안 계시지만 필자의 아버지와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사셨고 같은 약종상을 하셨던 어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는 19세에 한약사 시험을 통과해 경남에서 남성당한약방을 60여년간 운영했다. 약값도 저렴해 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찾았고, 하루에 많을 때는 약을 800제까지 지어 새벽 3시까지 일했다. 20대부터 주변의 어려운 학생들을 돕기 시작했는데 그 숫자가 1천명을 넘었다. 고등학교에서 대학 졸업까지 등록금, 기숙사비, 생활비까지도 지원을 했다. 그런 장학금만 30~40억원이 될거고, 사재로 설립한 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했는데 당시 시세로 110억원 등 거의 200억원 이상을 기부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부터 일관되게 평생동안 이어온 그의 기부나 지원은 이미 20대부터 어른이었다. 그는 말한다.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벌었다.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차곡차곡 모아서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다”.
그의 장학생들은 스텍트럼이 다양하다. 법대를 졸업하고 스님이 돼서 찾아온 사람도 있고, 헌법재판관, 교수, 군수 등 다양하다. 장학생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방문했다. “나한테 고마워 할 필요는 없고,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혹시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 데모를 해서 누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에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길은 똑같다. 민주주의를 위해 곤욕을 치르는데…. 그것도 사회에 기여하는 길이다”라고 존중해줬다. 또 장학금 받고도 특별한 사람이 못되어 죄송하다는 말에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다”고 답했다.
‘평등한 세상’ 지원한 선각자
진주 명신고 학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전교조 조합원을 해고하라는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교사채용의 원칙으로 “내 친척은 한 사람도 쓰지 않겠다. 돈을 받고 한 사람도 채용하지 않겠다. 권력에 굽히지 않겠다.” 한번은 국회의원이 지원한 사람을 잘 봐달라 부탁을 했는데 그 뒤 그 선생님의 채용을 무효로 했는데, 이후 교육부 감사와 세무조사가 나왔다. 그러면서 험한 세상 살아오면서 힘이 된 것은 깨끗하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예술, 시민운동, 환경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 도움을 주며 평등한 세상을 위해 형평운동, 차별철폐 등을 지원한 선각자이다. 특히 기득권과 정치세력에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과 단체를 위해 활동하고 지원했기에 다른 사람들의 기부와는 결이 다르다.
진정한 어른은 없고 꼰대들만 난무하는 이 세상. 그는 ‘무주상보시’(베풀고서 내가 줬다는 것조차 잊음)에 가장 어울리는 어른이다. 평생을 60년간 일한 그가 말한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을 많이 해왔습니다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세월은 정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의 삶을 도저히 닮을 수 없어 부끄럽다. 광주에서도 이런 분을 찾아 기록하고 알리는 일이 시작되기를 바란다.